다니카 셀레스코비치Danielle Selescov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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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08-10 20:59 조회2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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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79년 한국최초로 설립된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에 1기로 입학해 꼭 1년만인 1980년 9월 정부장학생으로 며칠 전 결혼한 아내와 함께 파리로 갔다. 난생 첫 해외여행으로 앵커리지를 경유해 23시간 만에 도착한 파리는 모든 게 낯설었고 모든 게 문화 충격이었다. 1년 전 먼저 파리를 다녀온 불어전공 아내가 아니었으면 길 잃은 나그네가 될 뻔했고 평생 공처가가 된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서의 3년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눈물과 땀으로 농축된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었다. 이 기간이 내 나머지 삶을 정의했던 것이다. 불어와 영어를 함께 익히면서 한국에서는 불모지였던 통역 공부를 끝내기에는 최단의 기간이었다. 다른 학문과는 달리 유럽 학생들에게도 대학원 2년 과정을 최장 3년 내에 끝내야 하는 스파르타식 훈련과정이었다.
나의 파리 생활 3년은 개선문에서 동북 쪽으로 지하철 두 정거장인 파리 3대학의 통번역대학원(ESIT)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학교는 돌이켜 생각하면 참 고마운 학교다. 그 학교에 다닐 때는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고 내게 더 신경을 써주지 않을까 원망했지만 그건 지나친 이기적 기대였다. 우리정부나 우리학교에서 그 학교에 주는 대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학교에 매 학기 낸 것이라곤 우리 돈 5만원가량의 학생자치회비 뿐. 우리 정부는 내게 한달 500달러의 장학금만 보내주면서 그 학교에 “국제협력의 정신으로 후진국 학생을 공부시켜 달라”고 배짱으로 요청한 셈이었다. 아무 기여도 하지 않는 개도국에서 온 학생실력이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데도 퇴학시키지 않고 3년이나 무료로 공부시켜 수준에 이르게 하고 졸업시켜 국제회의 통역 자격증까지 준 것은 프랑스라는 대국이 표방한 박애정신(fraternity)의 실천이었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다.
그래도 나는 귀국 후 1년만에 서울 올림픽 조직위의 통역안내과장이 되어 후배들 10명을 그 학교에 유학 보내면서 내가 힘껏 확보한 넉넉한 체육부의 예산으로 보은했다. 재정난에 빠져 있던 그 학교 운영자들이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원장이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20세기 최고의 번역학자 다니카 셀레스코비치Danielle Selescovitch였다. 1985년 파리로 출장 가 유학생 파견 협력각서 서명을 위해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니 “무슈 곽, 당신의 빛나는 출세brilliant career를 축하한다. 내 부친의 조국 세르비아 산 위스키로 계약 서명기념 축배를 들자”고 여장부다운 감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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